잊혀진 조류인플루엔자 사건 1918년 3월 11일. 미국 캔자스주 포트 라일리의 캠프 펀스턴 군병원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감기에 걸린 것 같다’는 병사가 몰려왔기 때문이다. 이 중 일부는 며칠 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유럽으로 향했다. 그해 5월 프랑스군 참호에서 ‘감기’가 돌았다. 6월엔 스페인에서만 800만 명의 ‘감기’ 환자가 발생했다. 이 역병을 프랑스인은 ‘스페인 감기’, 스페인인은 ‘프랑스 감기’라 불렀다. ‘프랑스 감기’는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독일군 막사를 덮쳤고 독일에서만 40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재앙은 아시아로 건너가 인도·중국을 휩쓸었다. 한반도도 비켜 가지 않았다. 그해 10월부터 4개월간 742만 명이 감염돼 14만 명이 숨졌다. 감염된 사람 중엔 백범 김구 선생도 있었다(『백범일기』). 정확한 희생자 수 통계는 없지만 전 세계적으로 2000만 명가량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세계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담배연기가 병원체를 죽인다는 소문이 돌아 흡연을 권장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14세기 유럽에서 페스트가 돌았을 때처럼 도시를 불태우지는 못했지만 장례식도 15분 내에 마쳐야 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대재앙이 너무 빨리 잊혔다는 것이다. 지금도 중세의 흑사병(黑死病)은 알아도 20세기의 ‘스페인 감기’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울산의대 이재담 학장은 『간추린 의학의 역사』에서 “1차 세계대전이란 역사의 소용돌이에 묻히고, 이 병으로 숨진 저명인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며 “희생자는 주로 15∼34세의 젊은이로 다른 연령대보다 20배나 높았다”고 기술했다.
원인은 감기 바이러스가 아니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였다. 2005년 미국 군사병리연구소 제프리 타우벤버거 박사는 원인 바이러스를 복원했다. 1918년에 숨진 한 일등병의 조직 표본과, 같은 해 사망한 뒤 80년간 얼음 속에 묻혀 있던 알래스카 원주민 시체 조직에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추출한 뒤 이를 되살린 것이다. 처음엔 ‘범인’이 돼지일 것으로 봤지만 두 시체에서 얻은 바이러스 유전자를 면밀히 검토한 뒤 ‘조류’에서 유래한 것 같다고 입장을 바꿨다.
최근 국내에서 조류 인플루엔자(AI) 의심 환자가 발생했다. 고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와 동남아시아에서 확산된 ‘AI 바이러스’(올해 국내에서 발생한 것과 동일)가 질병을 일으키는 유전자 염기서열 2300개 중 10개만 다르다”고 경고했었다. 지난해 방한한 WHO의 AI 전문가 가사이 다케시 박사는 “AI에 대한 대중의 경계심이 너무 풀렸다”며 우려했다. 방심은 언제나 금물, 방역에 더 힘을 쏟아야겠다.
자료 : 중앙일보 4월25일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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